검은 꽃 – 김영하

검은 꽃 – 김영하

 

검은 꽃 주요 내용

물풀들로 흐느적거리는 늪에 고개를 처박은 이정의 눈앞엔 너무나 많은 것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오래전에 잊었다고 생각한 제물포의 풍경이었다. 사라진 것은 없었다. 피리 부는 내시와 도망중인 신부, 옥니박이 박수무당, 몰락한 황족 소녀와 굶주린 제대군인, 혁명가의 이발사까지, 모든 이들이 환한 얼굴로 제물포 언덕의 일본식 건물 앞에 모여 이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_11쪽

누가 먹을 것을 주거든 백을 세고 먹어라. 그리고 누가 네가 가진 것을 사려고 하거든 네 머릿속에 떠오른 값의 두 배를 말해라. 그러면 누구도 너를 멸시하지 않는다. 소년은 그렇게 하려고 했지만 그럴 일이 별로 없었다. 먹을 것을 주는 이도 없었고 가진 것을 사겠다는 자도 없었다. 선교사가 눈을 크게 떴다. 배고프지 않으냐? 소년의 입이 달싹거렸다. 여든둘, 여든셋, 여든넷. 더이상은 무리였다. 소년은 향긋한 건포도 머핀을 집어들고 입안에 쑤셔넣기 시작했다. _16쪽

거대한 파도가 배의 옆구리를 밀어젖힐 때마다 흘수선 아래의 화물칸에 수용된 조선인들은 예의와 범절, 삼강과 오륜을 잊고 서로 엉켜버렸다. 남자와 여자가, 양반과 천민이 한쪽 구석으로 밀려가 서로의 몸을 맞대고 민망한 장면을 연출하는 일이 계속되었다. 요강이 엎어지거나 깨지면서 그 안에 담겨 있던 토사물과 오물이 바닥으로 쏟아졌다. 욕설과 한탄, 비난과 주먹다짐이 일상사였고 고약한 냄새들은 가시지 않았다. _45쪽

어째서? 김이정이 물었으나 장윤은, 그런 당연한 것을 왜 묻느냐는 투로 반문했다. 그럼 우리가 그들의 지배를 받으란 말인가? 이정은 지지 않고 따졌다. 어째서 반드시 한쪽이 다른 한쪽을 다스려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잠자코 있던 박광수가 힘없이 말했다. 왜냐고? 우리가 사라질까봐 그러는 거야. 우리는 소수고 마야인들은 셀 수 없이 많지. 그들과 섞여 종내는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질까봐 그러는 거야. 그렇지만 우린 어차피 모두 죽어. _341쪽

 

검은 꽃 느낀점

읽으면서 실화인지 아닌지 계속 헷갈렸다.

영화평론가 이동진 작가의 닥치는 대로 끌리는 대로 오직 재미있게 이동진 독서법에서 추천한 소설 김영하의 검은 꽃은 1900년대 초에 한국인들이 멕시코로 일자리를 구하려 1000여명이 떠나서 거기서의 삶을 그려낸 이야기로 무겁고 고단한 일상을 그려낸다.

작가 스스로 ‘만약 내 소설 중 단 한 권만 읽어야 한다면 바로 『검은 꽃』’이라고 밝힌 바 있는 명실상부한 대표작 『검은 꽃』이 개정판으로 새롭게 출간되었다. 첫 출간 당시부터 ‘역사소설이라는 맥이 풀려버린 장르를 미학적 가능성의 새로운 영역으로 등재해놓았다(서영채)’는 평가가 보여주듯 문학계 내외에 신선한 충격을 안겼던 이 소설은 지금까지 50쇄 넘게 중쇄를 거듭할 만큼 독자들의 꾸준한 지지와 사랑도 받아왔다.

동인문학상 수상 당시 “가장 약한 나라의 가장 힘없는 사람들의 인생경영을 강렬하게 그린 작품”이며, “올해의 한국문학이 배출한 최고의 수작”이라는 찬사를 받았고 여러 매체에서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었다. 복복서가판에서는 문장을 면밀히 다듬고 몇몇 주요 장면을 수정해 “이전 판과 꽤 다른 결의 소설로 변모”(‘개정판을 내며’ 중에서)했다. 또한, 책 말미에 남진우와 서영채의 해설과 작품론을 실어 『검은 꽃』을 더욱 풍부하고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

 

검은 꽃 서평

“영원히 쓰고 싶은 소설이 있다”
역사와 기억의 저편으로 스러진 모든 이들을 위한 진혼의 대서사시

『검은 꽃』은 대한제국이 “물에 떨어진 잉크방울처럼 서서히 사라져가”고 있던 1905년, 좋은 일자리와 미래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안고 멕시코로 떠난 한국인들의 실제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이민사를 그려낸 장편소설이다.

김영하 작가는 이 소설을 쓰기 위해 멕시코와 과테말라로 떠나 자료를 모으고 현지를 답사한 후, 그곳에서 머물며 집필을 시작했다. 일견 감상주의적인 민족 수난사처럼 보이는 이 소설은 그러나 시작부터 전혀 다른 방향으로 독자를 데리고 간다. 대륙과 대양을 가로지르는 대담하고 활달한 작가의 필치를 따라가다보면 독자들은 어느새 모든 것들이 격렬하게 충돌하고 붕괴하는 세계로 끌려들어가게 된다.

봉건과 근대가 부딪치고, 토착 신앙과 외래 종교가 갈등하며, 신분과 계급이 무너지고, 국가와 개인의 관계가 허물어지는 상황에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인간 운명의 절대적 조건에 대해 깊이 사유하게 된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인간들이 생존과 존엄성을 위해 투쟁하는 세계를 그리는 김영하의 묘사는 객관적이고 냉철하며 아이러니로 가득차 있다. 때로 유머러스하기까지 하다. 어조는 담담하지만 이야기들은 용광로처럼 뜨겁다.

이렇듯 간결하고 담백한 문체, 뚜렷한 중심인물 없이 다양한 인물들을 따라가며 전개되는 모자이크식 구성은 그 자체로 이 소설의 지향점이 민족 수난사의 감상주의적 제시가 아니라, 불운과 맞서 싸우지만 끝내는 패배할 수밖에 없는 인간 존재 일반의 운명을 드러내는 데 있음을 보여준다. 진부한 소설 문법을 혁신하려던 젊은 작가 김영하의 문학적 야심이 여기에서 분명해진다.

작가는 한 인터뷰에서 ‘검은 꽃’이라는 제목에 관해 이렇게 이야기한 바 있다. “검은 꽃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꽃이에요. 검은색은 모든 색이 섞여야지만 가능한 유일한 색으로 남녀노소, 계층, 문화, 인종을 뛰어넘는 그 무엇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죠. 그런 의미에서 꽃이라는 것은 유토피아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고 봐야겠죠.” 『검은 꽃』은 가닿을 수 없는 유토피아를 갈망하지만 결국 아무에게도 기억되지 못한 채 잊혀져버린 모든 인간들에게 작가가 보내는 ‘조화’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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